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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보루에서 바라본 북한산 능선, 귀임봉 데크에서 잡은 수락산 정상-
수락산 & 불암산<셀 수 없이 산은 많다. 한정된 공간에선 전혀 아니다>
제2367025055호 2025-06-17(화)
◆자리한 곳 : 서울 노원구.
◆지나온 길 : 마들역-수락산보루-귀임봉-영원암갈림-용굴암-학림사갈림-약사전-덕릉고개-철쭉동산-여근석-공릉산백세문-화랑대역
◆거리및시간: 6시간12분(12:51~19:03) ※ 도상거리 : 약16.4km <걸음 수(步行數) : 27,951보>
◆함께한 이 : 계백 혼자서
◆산행 날씨 : 비교적 맑음 <‘해 뜸 05:10, ’해 짐19:56’ ‘최저 20도, ’ 최고 29도’>
수도권 전철로 갈 수 있는 산행지! 새롭게 만들긴 결코 싶지 않았다.
시간과 이동에 제약이 없다는 전제한다면 거창하게 세계 동양까지는 들추거나 거론할 필요조차도 없다. 아담한 나라 한반도 구석구석에 분포한 산을 모두 탐방하려면 직업으로 등산을 택해서 평생을 찾아다닌다 하더라도 가능할까? 아니면 불가능한지? 불투명할 만큼 방대한 영역이다. 따라서 그런 조건에선 오늘은 어느 산에 갈까? 고민할 까닭 없이 마음 내킨 대로 계절 따라 테마 별로 명소만을 찾아다니며 즐기면 그만이다. 관광객 등쌀에 지쳤다면 주변의 비인기 산을 조용히 찾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도권이란 좁은 지역과 전철을 이용해서 등산이 가능한 산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거기다가 코스라는 마법을 동원해서 중복되는 느낌이 최소화되도록 새롭게 산행지를 만들어내긴 결코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지도와 씨름하는 장고 끝에 수락산과 불암산을 잇는 코스<마들역-수락산보루-귀임봉-학림사갈림-영원암갈림-용굴암-석촌공원-덕흥로-연화사(상계4동)-불암산-공릉산백세문-화랑대역=13.8km/6시간>를 완성했으나 산행도중코스를 변경했다.
-수락산행 들머리로 정했던 마들역-
마들 : 노원골' 아래는 넓은 평야에 갈대가 많아 '노원평'이라 불렀고, 말을 놓아기르던 곳, 또는 일대가 삼밭이어서 마들이 유래했다. 노원골에서 시인 천상병이 살았다고 한다. '거인손자국 바위'와 연계한 '거인발자국 바위'는 옛날 수락산에 살면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과 수락산의 동식물들을 지켜주던 거인이 개발의 영향으로 수락산이 파괴되고 마을공동체가 해체되자 수락산을 떠났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수락산 귀임봉 아래 있는 '채석장터'는 1960~1970년대 개발시대에 빈번하게 벌어졌던 토목공사에 이용하기 위하여 수락산 바위를 깨뜨려 석재를 공급했던 현장이다.
수락산(水落山) : 서울시 노원구,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에 걸쳐 있는 높이 638m의 산이다.
산이 그리 높지 않아 계곡은 아담하나 경관이 좋고. 바위와 모래로 이루어진 산이라 거대한 암벽 등의 기암괴석이 많으며, 샘터나 폭포도 많은데 수목은 적은 편이다. 서쪽 사면에는 쌍암사(雙巖寺)와 석림사(石林寺), 남쪽 사면에는 계림암(鷄林庵)과 흥국사(興國寺), 동쪽 사면에는 내원암(內院庵)이 자리 잡고 있다. 내원암 뒤에는 2m짜리 석조미륵입상이 있는데,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었다고 추정된다. 그 밖에 산자락에는 수락산 유원지가 있어 간단하게 쉴 수도 있다.
-수리산보루 풍경-
수락산 보류(水落山堡壘/ 아차산일대 보루군) :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산 59 일원. 수락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있는 능선에서 돌출된 봉우리(해발 192.5m)로 남쪽의 봉화산과 아차산 일원이 잘 조망된다. 북으로 긴 타원형으로, 전체 둘레는 173m가량이다. 보루의 남쪽 등산로상에 7단의 석축이 남아있으며, 내부에는 저수시설과 관련된 흔적이 확인된다. 온돌이 등산로상에 노출되어 있다.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삼국의 역사상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수락산 귀임봉 삼각점-
귀임봉(歸任峰) : 서울 노원구 상계동 산 52-7에 자리한 수락산 봉우리로 높이는 285m다.
이름 유래에 관해 여러 설이 있다. 돌아갈 歸, 귀할 任 옛날 관리들이 공무원들이 파견이나 왕명으로 나갔다가 서울로 복귀할 때 이 봉우리를 보고서 '아, 비로소 서울로 왔음을 알았다고 귀임봉이란 설과 명성황후가 1882년 임오군란을 피해 여주로 가던 길에 귀임봉을 지나 근처 암자인 용굴암으로 피신해 잠시 몸을 의탁하여 기도한데서 '귀한 사람을 짊어진 봉우리'란 유래가 전해온다.
-처음 만난 용굴암 연혁판에 홀려 진행 코스를 변경했다-
용굴암(龍窟庵) : 1878년 스님들이 천연 자연동굴에서 부처님을 봉안하고 참선수행 정진하면서 시작된 사찰이다. 수락산에 자리한 여러 사찰 가운데 가장 정상에 가까운 곳에 있는 사찰로 커다란 자연동굴에 있다. 이 동굴은 용굴암이 처음 시작된 나한기도 도량으로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용굴암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난 명성왕후가 피신하여 지내며 기도하던 곳으로 그 인연 공덕으로 매년 음력 9월 9일에 명성왕후 다례제를 봉행하여 오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사될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스님들의 중건과 중수로 유지되어 오고 있으므로 수락산 등반 중에 방문할 수 있다.
-학림사 약사전 앞 연혁판, 사찰 진입도로-
학림사(鶴林寺) : 서울시 노원구 수락산에 있는 조계사의 말사이다.
671년(문무왕 11)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머물며 수도하였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된 채로 있던 것을 1624년(인조 2) 무공(無空)이 중수하였다. 1780년(정조 4) 최백(崔伯)과 궤징(軌澄)이 중수하였고 단청했으며, 1830년(순조 30)에는 추담(秋潭)이 중창하였다. 1880년(고종 17) 영성(影惺)과 경선(慶船)이 판관(判官) 하도일(河道一)의 주선으로 왕실의 하사금을 받아 중수했으며, 1918년 4월에는 주지 금운(錦雲)이 중수하였다. 1950년 6·25 때 일부 건물이 소실했으나, 도원이 불사를 일으켜 크게 신장시켰다. 1985년 대웅전과 오백나한전, 설법전을 새로 지었다. 나한도량으로 유명하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오백나한전, 삼성각, 약사전 등이 있다. 오백나한전 안에 2012년 서울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약사전 안에 2006년 서울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석불좌상이 있다. 또한 대웅전 안에는 후불탱화를 중심으로 천불탱화, 신장탱화, 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삼성각 안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유물로는 2006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학림사 삼신불괘불도(三身佛掛佛圖)와 석종형(石鐘形) 부도 2기가 있다.
-덕릉고개에서 불암산 정상을 포기하고 우회길을 선택했다.-
덕릉고개(德陵峴) : 노원구 상계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선조의 아버지인 德興大院君의 묘소인 덕릉이 고개 동쪽에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덕릉현이라고도 한다. 덕릉으로 부르게 된 설화를 보면,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싶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모두 불가하다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정식으로 능 승격은 단념하고 한 가지 방법을 꾀하였다. 어느 날 동대문 밖 시탄상인(장작과 숯을 파는 장삿꾼)을 불러서 “너는 가게에 있다가 지나가는 시탄상인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덕흥대원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하면 후히 대접하고 나무와 숯을 고가로 사들여라.”하였다. 명을 받은 시탄상인이 그대로 이행하니 이 소문이 퍼져 5강의 시탄상인들까지 일부러 동대문 쪽으로 찾아와 덕릉을 지나왔노라고 하였다. 이 뒤부터 저절로 덕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불암산의 명물인 남근석과 여근석-
여근석(女根石) : 서울 노원구 중계동 산 101-56에 자리한 기암이다.
커다란 바위 한복판 틈새에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 그 모습이 여근과 흡사한데 방향을 잘 잡아 북쪽에서 바라보면 더욱 리얼하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여근석이다. 이곳 너럭바위도 아랫마을 동제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조선시대에는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여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호젓한 산속이었지만 둘레길이 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곳이 되었다.
-사실상 산행이 마감되는 곳인 공릉산 백세문-
공릉산백세문(孔陵山百歲門) : 통과하면 불암, 수락산인데 왜 '공릉산(孔陵山)'일까?
예종(睿宗)의 계비(繼妃) 장순왕후(章順王后) 한 씨 능은 사적인 파주 삼릉(坡州 三陵)의 하나인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奉日川里)에 있는 공릉(恭陵)은 존재하지만 공릉(孔陵)은 없다.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될 때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를 '공덕동'으로 개칭하면서 이때 '마포구'의 '공덕동'과 동명이 같으므로 처음에는 '태릉동(泰陵洞)'으로 정했으나 서쪽 '공덕리'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덕리의 ‘공(孔)’자와 동쪽 태릉의 ‘릉(陵)’자를 따서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시조례 제275호에 의해 태릉동이 설치되어 공릉동과 하계동 일원을 관할하게 되었다. 행정동과 법정동의 명칭이 서로 달라서 생기는 혼란과 불편을 덜기 위하여 1970년 5월 5일 서울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태릉동은 공릉동으로 명칭이 바꾼 것이다. 따라서 '공릉산백세문(孔陵山百歲門)'은 '공릉동(孔陵洞)'에 위치한 산으로 가는 문을 통과하면 100세까지 살 수 있는 건강을 지키는 문(門)이라는 뜻이었다.
수락산 용굴암 안내판에서 심경의 변화로 코스변경
비교적 맑은 날씨에 최고기온이 섭씨 29도 정도면 수치상으론 무더운 날은 아니겠지만, 공지중의 습도가 높은 편이라 후텁지근하고 심한 더위다 느껴졌다. 몸이 더워지며 체온조절을 위해 머리에서부터 쏟아지는 땀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고 연신 수건으로 닦아낸다. 수락산보루에서 귀임봉을 경유해 수락산 능선 따라 영원암갈림길 지나서 처음 접하게 된 '용굴암'에 호기심이 쏠렸다. 산행코스를 무시하고 일단 '용굴암'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보기에도 협소한 사찰공간을 넓게 쓰려는 의지로 대웅전이 절벽에 매달려 있는 풍경이 이채로운 황금빛 미륵불상을 뒤쪽능선의 탱크바위가 궁금해서 무작정 이동했는데, 까닭 없이 갑자기 바위가 무서워져서 겁쟁이로 변해 꽁무니 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용굴암를 경유 학림사갈림길로 복귀 학림사 약사전뒤 능선에 내려서 당고개역으로 내려서는 길목에 자리한 ‘수락산, 불암산 등산 안내도’와 마주했다. 산길로 잘 연결된 서울둘레길 코스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덕릉고개를 경유해 철쭉동산과 공릉산백세문을 통과해 화랑대역3번 출구에서 6시간 12분간의 산행을 마감했다. -끝-.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山을 찾아서~
2025-06-18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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