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장군이 군사를 지휘했던 수어장대, 복원된 성벽이 이어져 아름답다- 남한산성(南漢山城)<건국이후 최고 치욕의 역사 현장을 찾아서> 제2122023011호 2023-02-09(목) ◆자리한 곳 : 경기도 광주시 ◆지나온 길 : 마천역-등산로-수어장대-지화문-남장대-좌익문-장경사-여장대-전승문-연주봉옹성-좌익문-수어장대-마천역 ◆거리및시간: 5시간42분(12:14~17:56) ※ 도상거리 : 약15.3km <보행수(步行數) : 26,014보> ◆함께한 이 : 계백 혼자서 ◆산행 날씨 : 구름 많고 미세먼지 나쁨 <해 뜸 07:29 해 짐 18:04 / ‘최저 영하 -5도, 최고 9도> 3고 시대(고물가, 고금리, 고환율)를 살아내느라 답답해 나선 나들이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는 결손가정에 쓸모없는 칠순 늙은이 가장(家長)인 처지라 수입은 변변치 못한데, 공과금과 병원비 그리고 약값에 식료품 구입비, 어쩌다 분위기 전환용 외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구멍난 가계부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전업주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물가에 맥이 풀린다. 3고 시대(고물가, 고금리, 고환율)를 살아내는 답답함과 어려움을 400년 먼저 겪었던 민초들의 참혹함과 치욕의 역사현장인 남한산성을 다녀오기로 마음먹는다. 아이들이 출근하자 마음이 바빠 집안일을 서두르지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고 잔손질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아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사도우미 임무를 완수한다.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배낭을 꾸리며 야간산행도 감수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오시(午時)가 다가올 때쯤에야 집을 나선다. 수도권 전철을 공짜로 이용하려고 응암역으로 달려가니 곧바로 6호선 열차가 들어왔고 빈자리도 넉넉해, 편안하게 청구역에 도착 5호선으로 환승하려고 계단을 내려선 시간과 동시에, 마천행열차가 들어와 불필요하게 기다린 시간 없이 들머리에 도착한 즐거움으로 산행복장을 갖추고 마천역1번 출구에 남한산성 답사를 기분 좋게 시작한다.(12:14) -마천역 출발 1시간 10분만에 남한산성벽에 올라선다- 인조(仁祖) : 조선국의 제16대 국왕(재위:26년/1623년-1649년)이다. 선조(宣祖)의 다섯째아들인 정원군의 장남이다. 서인들이 쿠데타를 통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인조임금으로 28세에 즉위해 54세 승하 26년의 재위기간 내내 민초들을 편치 못했고 즉위 후 쿠데타 동지였던 이괄의 난을 피하려고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수원과 공주로 몽진(蒙塵)하면서도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했다. 유독 정통 명분주의를 주장하던 서인들 때문에 당시 급격하게 강성해지던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친명배금정책을 고집하다 후금의 침공을 받은 난리가 병자호란인데 아무런 실력이나 대책도 없으면서 겉으로 큰 소리만 치던 서인들의 유교 근본주의로 인해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농성하다 40여일만에 우리역사상 가장 큰 치욕을 겪으며 항복했고,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해 기근 등 인적, 물적 자원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포로와 공녀(貢女)등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지화문(남문) 성벽에서 내려다본 흐릿한 시가지, 둘레길 풍경- 인조반정(仁祖反正) : 광해군(光海君) 15년(1623) 4월 11일(음력 3월 12일)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최명길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반정이 일어난 해의 이름을 따 계해반정(癸亥反正) 또는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도 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 : 정묘호란 때 조선과 청(후금)이 맺은 정묘화약(丁卯和約) 이후에도 조선과 청나라는 갖가지 문제로 인해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에 청 태종(太宗)이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해 옴에 따라 두 나라의 관계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중화문명의 적통을 이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처럼 여기던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했고, 그러자 청 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했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조선의 방어선은 쉽게 뚫렸다. 겨우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의 지배층은 이렇다 할 군사작전도 구사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렸다. 국왕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농성하며 항전했으나, 강화도 함몰 소식 이후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왕이 직접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함으로써 병자호란은 50일 만에 종결되었다. -좌익문(동문) 역사테마 승병길은 통제중이다, 제2남옹성치 성곽풍경- 남한산성(南漢山城) :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홈페이지- -남한산성 축성당시 있었던 9개의 사찰중 유일하게 남은 장경사- 장경사(長慶寺)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에 자리한 조선후기 승려 각성이 창건한 사찰이며, 1983년에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 말사이다. 남한산성 축성 때 팔도의 역승(役僧)들의 숙식을 위하여 창건한 사찰로, 그 당시에 있던 9개 사찰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축성 당시 나라에서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를 번갈아 징집하여 사역(使役)을 돕게 하였는데, 각성은 1638년(인조16)에 창건하였다. 효종이 북벌(北伐)을 계획하였을 때에는 총섭을 두어 승군(僧軍)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내의 8개 사찰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지휘하는 국방사찰(國防寺刹)의 소임을 담당하였다. 그 뒤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북한산성과 함께 남한산성에도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로 교체하면서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승병들의 국방활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당우로는 동향한 정면 3칸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루(鎭南樓)·칠성각·대방(大房)·요사채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환향녀(還鄕女) : 병자호란을 후금(청나라)군이 철수하며 무차별적으로 조선여성 수십만 명을 끌고 가서 농락을 하다가 3만명을 돌려보내 주었다 이때 정절을 잃은 후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을 이르던 말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수만리를 걸어서 가족 찾아 조선에 돌아온 여인들은 국토와 국민의 생명을 수호하지 못한 위정자와 사대부들이 '더럽혀진 년'이라며 배척당해 결국엔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종용해 두 번씩이나 죽이는 비극적인 아픈 역사적인 사실로 호자호란으로 힘없는 조선의 처녀ㆍ유부녀들이 무려 50만여 명이 후금 땅에 끌려가 성노리개, 인질, 포로로 잡혀간 부녀자들이 목숨 걸고 탈출해 고국에 돌아왔으나 괴질, 사생아출생이 사회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홍제천ㆍ연신내 물로 여성기를 세척하면 처녀로 인정한다는 어명이 내려졌다 이후, 환향녀(還鄕女)가 출산한 자식을 호로(胡虜) 즉 호래자식이라 신종어가 생겨났다. -마을 신을 모신 청량당, 수어장대를 수호하는 멋진 소나무- 수어장대(守禦將臺)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로780번길 107-65 산성 서편의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4장대 중의 하나로 인조 2∼4(1624∼1626)년 사이에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수어장대란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 명령하는 곳이며, 건립 당시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하였고, 영조27(1751)년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을 증축하여 내편은 무망루, 외편은 수어장대라 명명하였다. 이 수어장대는 인조14(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친히 수성군을 지휘하면서 청태종(홍타이지)의 12만 대군과 대치하며 45일간 항전으로 버티던 곳이며, 항전 45일 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수어장대의 향나무, 남장대터 주춧돌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며 느껴진 안타까운 마음 계절을 앞선 포근한 날씨로 산행하기엔 편안했으나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이라 목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고, 성벽에서 바라본 산야와 서울의 고층아파트들은 시계가 불량해 모두가 희미하고 뿌옇다. 그래도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던지 휴식없이 강행군으로 예상했던 산행 시간보다는 상당시간 단축해 마감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거리를 ‘산길샘나들이’로 확인하고 이번엔 걸음숫자가 궁금해 만보기를 열어보고 경악한다. 만보기 기능을 아침에 확인했을 때 열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가끔씩 늦게 작동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작동하리라 믿었는데 산행이 끝나고 하산길에 체크하니 그때서야 작동을 시작했던지, 5시간 가까운 산행걸과물로 기록된 숫자가 겨우 800걸음에 머물고 있다니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하산길에 바라본 잠실 롯데빌딩과 먼지 가득한 하늘 풍경- 아무도 없는 한산한 산기슭을 혼자서 한 시간 남짓 하산길 머릿속을 떠다니는 단어 3개는 군주, 격, 깜냥이다. 만백성의 어버이신 “군주(軍主)는 하늘의 뜻으로 정해진다 하지만 거기엔 의무도 따른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백성들에게 나라에 충성해야 할 동기부여와 민심을 읽고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인데, 난리가 발생하면 조선의 나랏님도,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싸워보지도 않고 혼자 살겠다고 피란보따리 쌓느라 바빴으니, 격(格)<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에 맞는 처신이며, 과연 깜냥(어떤 일을 가늠해 보아 해낼 만한 능력)이나 됐었던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누구와 어디를 향한 분노인지 불분명하지만 부글부글 끓어올라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심각한 고민에 빠져든다. -끝-.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山을 찾아서~ 2023-02-11 계백 (배상) 클릭하시면 저에 관한 조금 더 많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goodhong.tistory.com |
잔여사진